공화국의 죽음과 새로운 시민의 탄생

아래글은 프레시안에 오늘 올린 글이다.


애도는 특히 그 죽음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을 때, 죽음에 대한 슬픔을 공유하며 사람들은 누가 이 사람을 죽였는지, 죽은 이 사람은 누구인지를 다시 물으면서 죽인 사람에 대한 강력한 적대를 형성하게 된다. 누가 죽였는가? 이명박 정부와 검찰, 그리고 하이에나 언론이다. 스스로를 일관되게 인간적으로도 노무현을 싫어했다고 말한 보수주의자부터 노무현의 정책에 거의 대부분 동의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진보주의자에 이르기까지, '검-권-언'이라는 거대한 권력'동일체'를 해체해야한다는 것을 절감하는 '우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애도는 이처럼 강력한 정치적 힘이 있다.

작년 촛불을 통하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외쳤던 이들이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민주공화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이들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의 삶의 강퍅함에 대한 슬픔을 공유하며,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우리들의 삶을 애도하고 있다. 자살한 전前 대통령의 주검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수구보수들의 의도대로 정의롭지 못하고 부정부패한 정치인의 주검이 아니라 그 너머에 보이는 공공公共적이고 조화調和로운 삶'이라는 공화국共和國 가치이다.

보라. 이 나라 어디에 공공적인 것과 조화로운 것이 존재하는가? 법과 감사의 칼바람에 전직 대통령마저 쓰러져버리는 이 사회의 어디에 시민들의 침해될 수 없는 존엄한 권리가 존재하는가? 사람들의 삶을 이 지경으로 만든 이 나라는 더 이상 공화국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애도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 자체, 즉 '공화국'이다. 그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역설적으로 이것이 집권기간 내내 '대결과 불화'의 정치인으로 비하되었던 노무현을 '소통과 화합'의 정치인으로 재생하고 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노무현은 역설적으로 공화국의 가치를 지킨 '마지막 대통령'으로 복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슬퍼하고 있는 죽음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죽임이 아니라 공화국의 죽음 그 자체인 것은 아닌가?

노무현, 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 노무현 전 대통령 영결식 장면. ⓒ프레시안
공화국이라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은 어떻게 운용, 유지되는가? 간단하게 말해 공화국이란 사회적 갈등이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 말과 협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는 체제가 아닌가? 말로 하자는 것, 제도권의 영역에서 말로 타협하여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는 체제, 그것이 바로 공화국이다. 그래서 공화주의자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보수주의자들도 있을 수 있다. 공화주의는 철저하게 제도의 운용에 대한 형식적 문제이지 정책 내용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노무현은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타협의 과정을 존중한 근세사에 보기드문 대통령이었다. 그가 권력 기관에 의한 강권과 공작이 아니라 말의 가치를 인정하고 믿었다는 점에서 그는 '말과 토론'이라는 공화국의 가치에 기반을 두어 통치를 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이 애도의 과정에서 복기되고 있다.(물론 그의 말과 토론은 철저하게 제도권 내에서의 문제이다. 거리의 정치에 대해서 그가 취한 입장은 더 복잡하다. 아래에서 이야기하는 공화국은 철저하게 제도 정치 내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이러니이다. 사실 노무현은 집권 기간 내내 수구보수들은 그의 집권 기간 내내 그를 대결과 불화의 상징으로 몰아갔다. 그가 자신의 파당을 떠나서 공공의 조화를 추구해야하는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의 임무를 망각하고 '회전문 인사'와 '코드 인사'를 통하여 대화와 타협 없이 자신의 주장대로 밀어붙였다는 것이 주된 비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러한가? 꼼꼼히 살펴보면 우리는 놀랍게도 노무현이 제도 정치 안에서 한편에서는 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지만, 다른 한편 권력을 가진 통치인으로서는 법과 제도의 문제(즉 제도권의 영역)에서 수구보수와 끝까지 말로 해결하려고 한 인물이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대연정의 제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정말 그들 모두를 아우르는 공화국-共과 和의 나라 -대통령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소원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한국의 수구보수는 말과 타협의 가치를 믿지 않고 그 가치를 존중해주는, 그런 공화주의적 가치가 마음에서 완전히 결여된 존재들이다.(아이러니하게도, 미디어법이나 다른 법과 제도의 정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 불화를 실체화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이명박 대통령이다. 그는 애초부터 공화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기득권자의 이해 수호자로 나섰기 때문이다.)

여기에 노무현의 딜레마가 있었다. 그는 수구보수를 공화국의 파트너로 인정을 하던지(이럴 경우에 그가 취할 수 있는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정책은 거의 없다), 아니면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가치를 밀어붙이던지(이럴 경우 그는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기를 포기하고 우리 사회가 근본적 불화상태에 빠지는 것을 감당해야한다)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야 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그는 공화국이라는 틀을 지키는 것을 택하였다. 그 결과 그는 대통령 개인으로서는 수구보수 기득권에 대해서 적대적 태도를 취하였지만, 통치의 영역인 법과 제도에서는 그 어떤 불화와 적대도 실체적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그 분열은 곧 대화와 통합의 정치의 종식, 즉 형식 민주주의 안에서의 공화국의 포기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이 혼란은 노무현 아니라 노무현 할아버지라고 하더라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사회의 분열'이 아니라 '자신의 분열'을 택한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플라톤의 '하나가 되기 위해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는 전세계와 불일치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격언의 정확하게 거꾸로 간 비극적인 인물인 것이다.

법과 제도 개혁 앞에서 무릎 꿇은 공화국의 가치

대표적인 것으로 대체복무제가 있다.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만난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후배가 병역거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들 '이렇게 갈 것 같으면 병역거부라도 해결해 놓고 가시지....'라고 한탄하고 안타까워했다는 것이다. 사실 노무현은 소위 개혁이고 진보라고 스스로를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거부감을 가졌던 병역거부의 권리를 인정한 최초의 대통령이었다.

이것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을 하는 임재성씨의 글에서도 알 수 있다. 그가 쓴 글의 제목이 '총 들지 않을 자유, 그는 알아줬다'이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바로 이명박과 노무현을 가르는 기준점이라고 말을 한다. 맞다. 그래서 나도 노무현이 이명박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과는 민주주의와 인권, 즉 인간에 대한 관점은 달랐다고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노무현이 빠진 근본적인 딜레마 때문에 그가 대체복무제를 제도화할 수 없었다. 그는 대체복무제를 '알아주는'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영혼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래서 그의 영혼'만'이 우리와 함께 있었던 집권기간에 당연히 그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을 치지 않을 수 없었고, 영혼만 보게 되는(봐도 되는) 그의 죽음 이후에는 우리가 그토록 그의 가치를 존중하고 복기하며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사형제 폐지도 마찬가지였고, 국가보안법도 그렇고 언론 개혁이나 검찰 개혁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우리 사회가 근본적인 불화 상태에 빠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그가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법과 제도가 아니라 관행이었다. 사형제는 집행되지 않았고 국가보안법은 '사문화'되었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건드리지 않는 한 모든 적대는 실체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통치는 법과 제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행에 반하는 법과 제도를 남겨둔 채, 그 관행만으로는 처리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그 사문화되었다고 이야기하는 법과 관행들이 다시 무소불위의 칼이 되어 돌아온 것을 보고 있다.

용산참사 이후 문제가 되어 있는 검찰의 수사기록 공개 거부에 대해서도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검찰이 기소를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집권 기간 동안 그는 내내 검찰의 권력과 싸웠지만 검찰기소독점의 폐해를 해소할 수 있는 그 어떤 제도나 법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어디 이것들뿐인가? 돌이켜보면 수많은 일들이 그러했다. 그는 관행적으로 막을 수만 있었을 뿐 그것을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장치는 거의 아무것도 만들지 못했다. 노무현 역시 그 칼에 의해 희생되었다.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법 하나 바꾸는 것이 더 어렵다

노무현의 죽음에서 우리가 배워야하는 것은 권력의 하부 구조의 민주화 없는 권력 교체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대통령을 갈아치우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어려운 것이 국가보안법이건, 대체복무제이건, 사형제 폐지이건, 이런 제도 하나를 고치는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보다 법과 제도를 뜯어 고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아야한다. 이것은 우리가 숱한 정치/사회 투쟁에서 범한 오류이다. 속된 말로 우리는 많은 투쟁에서 '현금주고 어음 받는' 어리석은 짓을 참으로 많이 해 왔다.(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의 '아름다운 도전'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내가 상대해야 할 경제 관료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차 있는 사람들이었다. 2002년 대선 전야, 이회창의 낙승을 예상하고 있던 관료사회는 노무현의 당선가능성이 높아지자 충격에 휩싸였다. 그 때 재경부의 한 고위관료가 내뱉은 말이 여러 사람에게 회자되었다. "노무현 아니라 권영길이 돼도 상관없다!")

지난 촛불 때만 하더라도 사람이 많이 모인 것에 고무되어 무조건 청와대로만 외치다가 결국은 어청수 하나 제때 쫓아내지 못했으며, 집시법이든 무엇이든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는 그 어떤 법도 제대로 민주화해내지 못하였다. 오히려 우리는 투쟁을 통하여 국정쇄신과 인적 청산을 요구할 때마다 권력의 시스템을 민주화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물갈이만 도와주는, 그것도 늑대 쫓아내고 호랑이 불러들이는 식의 악순환에 빠지기도 하였다. 지금 노무현의 서거 이후에 한나라당에서 제기되고 있는 인적쇄신과 국정기조 전환이 민주주의나 인권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오히려 친이계 파벌간의 파벌다툼의 명분만을 제공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봐야하는 것은 바로 악의 평범함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노무현이 희생되게 된 것에는 검찰과 경찰, 그리고 국세청의 '충성경쟁'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권력 앞에서 알아서 슬슬 기고 과잉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용산참사도 그런 과잉충성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고 보았다. 맞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만약 노무현을 조사한 검사나, 용산을 침탈한 특공대가 악마가 아니라 그들은 아주 평범하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은 그리 과잉하지 않고 그저 수행한 것이라면? 이것이 악의 평범함이다. 관료제사회에서 악이 이토록 평범한 것이라면, 우리는 악을 악마화, 그들을 악마화 하는 방식으로는 거의 아무런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악마를 솎아 내봤자 악의 평범함은 평범한 사람을 통해서 언제나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오히려 우리가 초점을 맞추어야하는 것은 악의 악마화를 용인하는 현재의 권력 구조이며 그 권력 구조가 작동할 수 있는 법과 제도의 문제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마르크스를 빌려 고병권이 비꼬는 것처럼 교회는 그냥 두고 교황만 없애려는 시도이고, 당나귀는 그냥 둔 채 자루만 두들겨 패는 격이 된다.

그래서 책임자 처벌이 못지않게 법과 제도가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그 예를 국가인권위에서 볼 수 있다. 일단 한번 만든 제도이다 보니 이 정권이 없애기 위해서 그토록 노력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엄청난 저항에 부딪쳤다. 결국 인원을 감소하는 것으로 귀결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이 제도가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버틸 수 있었을까? 제도가 아닌 관행이자 '별정직'이나 '임시직' 형식의 다른 모든 제도들에서 이명박 정권이 사람을 내쫓고 기구를 축소한 것과 비교해보면 이 차이는 더욱 크게 드러난다.

법과 제도, 특히 권력의 졸(卒)들이 부리는 하위 권력의 민주화가 없이는 법은 언제든 강권통치의 수단으로 바뀌고 하부권력을 악마로 만들 수 있다. 이명박 정부가 독재 권력인가? 맞다. 그러나 이 정권은 박정희와 전두환과 같은 '초법적인 독재권력'이 아니라 '법을 통한 독재권력'이다. 이것이 이명박 정권이 내내 법치를 강조하는 이유이다. 그렇기에 바로 이명박이 이야기하는 그 법과 제도, 그것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공화국을 향하여

칸트는 도덕형이상학에서 루이 16세의 처형을 '국가의 자살'이라고 부른다. 프랑스 국민들은 사실 도망가던 루이16세를 붙잡자마자 바로 죽여 버릴 수도 있었는데(즉 살해할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단두대로 끌고 가서 '처형'을 시켰을까? 이에 대한 칸트의 이야기와 주판치치의 해석을 따라가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살해는 국왕 개인의 죽음으로 귀결되는 것이지만 처형은 국왕이라는 형식, 혹은 제도의 종식이 되어버린다. 국왕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처형함으로써 프랑스의 국민 모두는 이미 국왕제라고 하는 제도를 유지하면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죄인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피하기 위해서라도 국왕의 처형과 함께 왕정제를 폐지해야만 했다.

노무현의 죽음은 정확하게 그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현재의 형식적인 공화국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는 형식적으로만 죽어야했다. 법의 심판대 앞에 끌려가서 법의 엄정함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어야 했으며 이를 통해 부정부패로 상처받은 형식적인 공화국은 재생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신체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림으로써 수구보수들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닌 부정부패라는 '사실(지금은 이것도 어느 정도 사실인지에 대해서 온갖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는 터이지만)'에 맞서 공화국의 진실(이 공화국이 전혀 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폭로하였다. 형식적으로만 죽어야하는 존재가 진짜로 죽어버린 것이다. 공화국의 가치를 지키고 싶어 했던 공화국의 대통령이 권력에 의해 신체적으로 자살함으로써 공화국은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처럼 노무현의 죽음은 공화국의 죽음이다. 말과 토론, 그리고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면 '절제와 품격'있는 법집행이라는 공화국의 원칙과 가치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죽은 공화국은 노무현 대통령에게만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공화국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가 지키기를 원했던 공화국은 허상-유령이었다. 수구보수 기득권들의 공화국에 대한 파괴의 협박위에 세워진 것이 한국의 공화국이다. 노무현의 죽음과 함께 우리는 비로소 우리 모두가 '벌거벗은 임금님'을 향해 소리를 치는 것처럼 우리 사회가 공화국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의 과제는 이제 공화국을 만드는 것이다. 공화국의 죽음을 애도하고 말과 토론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야한다. 작년 광우병 파동으로 이 공화국 안에서의 삶의 처지를 경험했었고, 올해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죽음을 공유하게 된 '우리'가 말이다. 이 우리는 과연 새로운 공화국의 새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것인가? 이것은 전적으로 그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다. 그러나 적어도 삶과 죽음에 대해 이토록 독특한 경험을 공유하며 공화국과 민주주의에 대한 공동의 감각을 가진 새로운 '우리'의 탄생은 적어도 '희망의 사건'인 것임에는 틀림없으니.

자. 이제 노무현을 넘어 새로운 '우리'를 보자. 노무현을 애도하며 우리가 무엇을 기억했고, 무엇을 보았는지를 이야기하자. 그러면서 우리가 무엇을 만들었는지를 보자. 무엇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만들지 않았는가! '우리'가 있다면 여전히 새로운 것을 시작할 힘은 있는 것이다. 당신을 넘어,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이 '우리'를 보며, 편히 쉬세요. 노무현 대통령.

/엄기호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위원 메일보내기

by 엄교 | 2009/06/05 17:51 | 거리에서 냉소주의를 넘어 | 트랙백 | 덧글(0)

정치는 음모와 공작을 넘을 수 있는가?


모 잡지사와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나누었던 아시아의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글을 시작하려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자료랑 사람들 만난 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40년만에 민주주의 절호의 기회를 잡은 말레이시아의 경우만 하더라도 그렇다.

2월에 한 야당의 유력한 인권활동가이자 정치인인 여성의 나체사진을

전 남자친구를 매수하여 인터넷에 뿌려 정계를 은퇴하게 한 일도 있고,

부정부패 혐의를 받던 의원들이 대거 여당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지역의회의 권력이 한순간에 넘어가게 생긴 일도 있으며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처럼 인종과 종교를 이용해서 민의를 왜곡하려는 공작 정치까지...

급기야 4월에 총리로 지명된 사람은

자기의 측근들이 절친한 친구의 여자친구를 암살하는데 연루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은 눈에 보이는 독재가 아니고 권력 기관을 총동원한 '음모'와 '공작'이다.

대다수의 아시아 국가들이 권력집단의 음모와 공작을 넘지 못하고 그 앞에서 자초하였다.

검찰, 국세청, 감사원, 국정원, 선관위 등등...


지금 전개되고 있는 인적쇄신이라는 단어에서도 권력암투의 음모 냄새가 물씬난다.

시스템의 변화가 아니라 국정전환과 인적쇄신을 요구하다가

이상득 쫓아내고 이재오 불러들인다면

이건 뭐,

늑대 쫓아내고 호랑이 부르거나

현금 주고 어음 받는 불상사가 되는 것 아닌가.


내가 속한 진보신당이 고작 의석 한개짜리 초미니정당에

프랑스의 브장스노같은 허리케인급 스타 정치인이 있는 것도 아니라

지금 당장 어떤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당은 책임자 처벌, 내각총사퇴 뭐 이런 인간에게 초점을 두지말고
 
검찰기소독점제 폐지 등 선도적으로 권력기관의 해체와 민주화를

어떻게 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비전을 내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우리당과 진보진영이 새로운 공화국과 그 상을 요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의 죽음과 더불어 87년체제, 혹은 6공화국은 끝난 것이 아닌지.

애도는 강력한 정치적 힘이다. 죽음에 대한 애도를 통하여 사람들은 종교적 열정을 가지고 새로운

정치체를 만든다. 이슬람의 시아파는 후세인의 죽음위에 세워진 종파이며

숫자는 수니파에 비해 적지만 예언자의 죽음에 대한 기어과 애도를 통하여 어디보다

강력한 종파가 될 수 있었다.

노무현의 죽음이 한나라당의 바람대로 지나가는 광풍이 될지

아니면 새로운 공화국을 요구하는 새로운 '무리'의 탄생이 될지는 좀 더 봐야알겠지만

작년 광우병과 촛불로 '살고자 하는' 투쟁을 통해 강력한 공동의식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

죽음과 애도까지 통과하는 공동감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바램대로 그리 쉽게 해체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 바램을 깨기 위해서 숱한 공작과 음모가 다시 활개를 칠 것같다.

그들에 대한 지지로 돌이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방향으로...

이럴수록 정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고

삶의 지속성과 가능성에 대한 희망의 언어를 전파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새로운 공화국의 헌정질서와 권력 제도는 어떠해야하는지

우리당(진보신당)이 1명의 의원을 가지고 건방지게도 총체적 그림을 내놓는

어마어마한 작업을 해버리면 안될까? ^^;;


by 엄교 | 2009/06/04 03:49 | 트랙백 | 덧글(0)

마지막 보루를 지키기 위한 진중권의 싸움

촛불과 노무현의 죽음으로 국민들의 분노는 높아지고 있지만 가시적인 '정치권' 바깥에서 기득권자들의 '비가시적 혁명'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진행되고 있다. 가시적인 정치권에서는 인적쇄신을 한다, 통치 스타일을 바꾼다, 난리를 치고 있지만 그 그늘에서 정치의 하부구조, 정치의 '진지들'은 소리소문없이 점령당하고 있다. YTN이 그렇고 KBS가 그렇고, 지금 난리가 난 한국예술종합대학이 그렇다.

러시아와 같은 체제가 아니라 서구국가에서는 기동전이 아니라 진지전을 펼쳐야한다고 설파한 것은 '좌파' 그람시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전략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은 '우파'들이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좌파는 여전히 '한꺼번에 되찾는' '중앙권력'의 장악에만 신경을 쓰며 우리 발밑, 정치의 '하부구조'인 진지들이 점령당하는 것에 제대로 힘을 모으지 못하고 있다.

정치의 진지인 문화와 교육, 방송과 여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전세계를 집어삼키는데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대학이다. 2차대전 후 케인즈주의에 불만을 품은 몇명되지도 않는 자유주의자들이 만든 볼품없는 지식인 서클이 대학을 장악하였고, 이들이 시카고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들이 가르치고 훈련한 인간들은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행정엘리트들이었다. 신자유주의가 세계에서 가장 먼저 전면적인 국가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곳은 미국도 영국도 아닌 칠레이다. 아얀데 정권을 붕괴시킨 피노체트의 군사독재정권이 시카고 유학파 - 시카고의 아이들 - 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자들을 대거 경제관료로 등장시켰기 때문이다.

혁명은 개혁처럼 하고, 개혁은 혁명처럼하라는 말이 있다. 개혁을 하려거든 먼저 구체제와 단절하고 구체제의 법과 제도를 일거에 정리하지 않고서는 결코 개혁을 이뤄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대중-노무현 10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국가보안법, 대체복무제 등 어떤 법도 제대로 정비하지 못하였다. 개혁을 개혁처럼 하려다가 좌초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이명박은 혁명을 개혁처럼 하고 있다. 이들은 '법과 감사'를 내세우며 언론과 대학, 그리고 문화 진지들을 점령하고 있다. 애초에 이들이 목표에 두고 있는 것이 법과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권력의 탈환이라는 혁명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들은 법과 제도의 개혁이라는 우회로를 통하여 숙청과 반대파의 씨를 말려버리는 혁명을 성공시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법과 제도의 개혁에서 내세우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과 법치이다. 노무현(혹은 그의 가족)이 댓가성이 있건 없건 돈을 받은 '도덕적 결함'은 '사실'이 아닌가? 그것이 표적수사이건 뭐건 돈을 받은 사람이 처벌을 받아야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한예종의 황지우 총장이 600만원 영수증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은 것은 '어쨋든' 사실이지 않은가? 진중권 교수가 계약관계야 어떻든지 2학기에 수업을 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 아닌가?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사실에 대해 말을 할뿐 사실에 입각해서 일을 처리할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이것이 오늘 유인촌이 한 말의 핵심이지 않은가?) 이처럼 그들은 주장/사상에 근거하지 않고 사실에 근거하여 '무미건조'하게 그들이 관료로서의 일을 처리한다고 말을 한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그저 '관료'이며 '관료적 일처리'를 하고 있는가? 쥬판파치(혹은 지젝)이 말을 한 것처럼 신으로 착각하는 하위관료보다 더 무서운 것이 스스로를 하위관료로 착각하는 신이다. 하물며 하위관료인 척 하면서 신의 일을 하고 있는 악마인 경우에야! 하위관료가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사실을 다룬다면, 신은 그것을 언제/어디서/어떻게/누가 문제삼을 것인가에 대한 사실에 대한 이야기, 즉 진실을 만드는 사람이다. 하위관료가 행정의 문제라면, 신은 권력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하위관료의 '사실'에 맞서 신(혹은 악마)의 '진실'을 요구하여야한다. 끊임없이 사실만 상대하는 무미건조한 하위관료인 척 하는 이 신의 정체를 폭로하여야한다. 그러나 이 신의 정체를 폭로하는 방식은 끊임없이 하위관료를 다루듯이 폭로하여야한다. 여기에 냉소주의, 원래 이명박과 유인촌이 그렇지 뭐.라는 냉소주의가 끼어들 틈은 없다. 나는 이미 그들이 하위관료가 아니라 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며 어깨를 으쓱 한 번 드는, 바로 그 냉소주의가 끼어들 틈은 없다. 언젠가 '한꺼번에' 되찾을 것이라며 신 그 자체와의 한 판 싸움만을 기다리는 그 냉소주의가 끼어들 틈은 없다. 하위관료인 척 하는 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하위관료가 있는 바로 그 자리, 그 진지로 내려와 무미건조한 듯이, 7급 공무원을 상대하듯이, 그 뒤에 작동하는 권력과 맞서야한다.

저들의 '사실의 도덕'에 맞서는 '도덕의 진실'이 바로 우리가 서야할 자리이다.


진중권은 지금 하위관료인 척 하는 이 신이 반동적 혁명에 맞서는 싸움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이 싸움의 응원꾼이기에 그쳐서는 안된다. 이것은 단지 진중권을 방어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진지를 허물어뜨리고 점령하려는 개혁처럼 진행되고 있는 현 정권의 반동적 혁명에 맞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당원으로 있는 진보신당의 임무는 무엇인가? 진보정당이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존립을 해야할 것인가? 당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싸우고 있는 이들과 대표단이든 누구든 당에서 책임질  수 있는 사람들이 소통하는 것, 그것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면 한다. 그들의 싸움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고, 그 자리에서 우리가 함께 하는 모두의 싸움으로 가져와야한다.


정말이지, 다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이미 손을 댄 김미화? 아니 나아가 손석희?

이들 모두를 다 잃고 무엇으로 싸울 것인가?

by 엄교 | 2009/06/03 06:08 | 거리에서 냉소주의를 넘어 | 트랙백 | 덧글(0)

노무현의 죽음 2: 우리는 무엇을 슬퍼한 것일까?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무엇을 배울까
2009년 05월 30일 (토) 15:51:24엄기호  uhmkiho@empal.com

  
▲ 노제가 열린 시청앞에서 슬퍼하는 시민들.(사진: 고동주)

그냥 나 좀 슬퍼하게 해줘. 그냥 울고 싶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에 나를 애타게 찾는 아이가 있었다. 이전에 하자센터에서 인문학을 같이 공부한 아이였는데 노무현이 죽고 나서 계속 눈물바다란다. 주변사람들이 딱해서 못보겠다고 나보고 연락 좀 하라고 성화였다. 아이에게 간단한 문자 하나를 보냈다. '너 지금 만나면, 내가 나를 주체 못할 것 같다. 좀 지나고 보자.' 난 이 아이가 서럽게 우는 그 이유를 듣는 것이 두렵다. 

후배 중에 덕수궁에 가서 절대 조문 같은 걸 안 할 것 같은 친구가 있다. 이 친구가 조문을 갔다 왔다고 한다. 자기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자기만큼이나 그런 곳을 안 갈 것 같은 '탈정치화'된 자기 친구가 가자고 해서 갔단다. 가서 그 친구가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왜 우냐고 물으니 후배 입을 틀어막으면서 '묻지마. 그냥 슬퍼. 그냥 나 좀 슬퍼하게 해줘. 그냥 울고 싶어.'라고 하더란다. 그 친구 우는 걸 보다 자기도 슬퍼져서 울었다고 한다.

나 노사모였나봐

친한 교수 중에 한 사람이 대학원 수업시간에 한 시간이나 넋두리를 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압권이 자기가 그렇게 슬퍼하는 걸 보면서 스스로 놀래서 '어머나 어떻게 해. 나도 몰랐는데 나 노사모였나봐.'라고 한 말이다. 물론 이 교수는 노사모가 아니다. 교수는 넋두리 하는 내내 노무현이 자기에게 이렇게 가까이 있고 자기가 그렇게 노무현에 밀착되어 있는지를 몰랐다며 스스로도 헷갈려하였다. 수업 내내 다른 대학원생들도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고 한다. 

슬퍼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아는 기자가 문자를 보냈다. ‘아...이 긴 행렬은 무엇일까요. 별로 슬프지 않은 나는 진정 사이코패스인가요?’ 슬프면 슬픈대로, 슬퍼하지 않으면 슬퍼하지 않는대로 우리 모두가 어떤 것에 감염이라도 된 듯하다. 

우린 무엇을 슬퍼하는 걸까.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사회주의자’에서부터 ‘자유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이토록 다양한 사람들이 이토록 절절하게 애도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 많은 해석들이 나왔다. 공모를 한 것 같은 죄책감부터 정부에 대한 분노까지. 잠시 질문을 바꾸어보자. 우리가 ‘왜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이 슬픔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로.

  
▲ 장례식 전날 자정이 넘도록 사람들은 대한문 분향소 앞을 떠나지 못했다. 덕수궁 돌담 옆에서 어떤 이들은 종이학을 접어 나무에 걸었다. (사진: 한상봉)

질문을 바꿔야.. '이 슬픔으로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로

그의 장례식에 이르기까지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 그리고 학생들의 하소연을 듣다 나는 문득 알게 되었다. 이 사람들, 노무현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들이 본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꼬라지’이다. 지금 여기서 사는 모습의 궁상맞음과 망가짐과 팍팍함과 초라함과 강퍅함을 슬퍼하고 있는게다. 우리는 노무현의 죽음에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의 비극을 보았다. 

권력의 정점까지 올랐던 대통령마저도 알고 보니 ‘텅 빈 생명’, ‘벌거벗은 삶’이었다. 그의 삶 전체가 조롱당하였지만 그는 무력하였다. 그의 가족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다 한 외신의 표현대로 하면 들들 볶였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유서에 나오는 것처럼 그는 남은 여생, 주변사람들에게 짐만 될 수 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었다.

그의 죽음뿐만이 아니다. 최진실의 죽음에서 사람들이 본 것도 참 가진 것 많고 남 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알고 보니 텅 빈 삶을 살았다는 것에서 오는 동정과 연민이었다. 산다는 것이 위대하기는커녕 바람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고 보잘 것 없으며 헛헛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우리는 최진실의 죽음에서 보았다.

구차한 내 삶을 슬퍼하고 있어..

노무현의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정서는 최진실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정서와 그리 멀지 않다. 그가 가고 난 다음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이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정점에 올랐던 최진실의 죽음에서 많은 여성들이 그들과 다르지 않은 '같은 여성'의 삶의 강퍅함에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말이다.

몰락이, 죽음이, 나락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 저런 사람들마저도 삼키는 그런 나락이 우리 삶에 아가리를 떡 벌리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다는 것. 그 나락을 보며, 우리는 나락에 떨어져 죽은 자를 보며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나락옆 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애도하고 있다. 우린 정말이지 산다는 것이 품위 없고 보잘 것없으며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여기에 죽음이 아닌 산다는 것에 대한 애도가 있다. 

왜 그를 미워할 수 없었던가. 그는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 분열적이 될 수밖에 없음을, 권력의 정점에서도 보여주었다. 분열적인 삶이란 무엇인가? 전교조의 교사가 자기 아이에게 사교육을 시키고, 공교육이 싫어서 대안학교를 보낸 학부모가 방학이면 선행학습과 과외를 시킨다. 직장을 때려 치고 나와 카페를 차리고 공동체 운동을 하는 후배는 주식투자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으며, 양심적으로 살아가며 많은 시민단체를 후원하는 친구는 들어가 살만하면서 투자 가치가 있는 아파트를 보러 다닌다. 이처럼 우리 모두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분열적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분열의 빈틈에서 적당한 합리화와 죄의식이 뒤죽박죽으로 엉켜있는채 우리는 살아간다.

  
▲ 장례 전날 명동성당 추도미사에 참석한 신자들.(사진: 고동주)

살기 위해 분열적일 수밖에 없는.. 우리를 슬퍼해

노무현은 권력의 정점에서 이런 분열적인 삶을 보여주었다. 진보신당의 당게시판에서 한 당원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는 날 노무현이 멍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향해 '지금 국민들이 저를 보고 계십니까?'하는 말한 장면을 보고 그의 고독을 느꼈다고 하였다. 바로 그것이 노무현의 분열이었다. 그는 집권 기간 내내 그의 영혼과 그의 통치가 분열되어 있음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국가인권위가 파병을 반대했을 때 ‘국가인권위원회는 그런 것을 하라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을 했을 때, 대통령 못해먹겠다고 말을 했을 때, 봉하로 내려가서 한 첫 번째 말이었던 '죄송하지만 참 좋다' 등. 그는 집권 내내 항상 자신의 영혼은 자신의 통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이 있는 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노무현의 고뇌, 비록 지금 당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하지만 나의 영혼은 당신들과 함께

'나는 비록 지금 당신들이 반대하는 것을 하지만 나의 영혼은 당신들과 함께 있습니다.' 이 것이 집권해 있을 때는 그를 변명으로 일관하는 비겁한 대통령으로 만들었지만, 막상 그가 가고 나자 우리들에게 ‘분열적일 수 밖에 없었던’ 비극적인 우리 모두의 초라하고 팍팍한 삶을 그를 통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나는 그의 통치에서 그가 자신의 영혼과 통치를 분열시키지 않았던 몇 개 안되는 정책 중의 하나가 한미FTA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라크파병과는 달리 정말로 한미FTA를 누구로부터 등 떠밀려서 한 것이 아니라 나라를 살릴 길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퇴임 이후 봉하로 내려갔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의 성공을 빌었다. 사람들은 그가 죽는 것이 아니라 '돌아오니 참 좋다'고 활짝 웃었던 것처럼 봉화에서 영혼과 삶이 일치하여 살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의 죽음은 시골로 내려가더라도 그런 삶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죽음은 그런 통합적이고 ‘참 좋은 삶’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절망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젠장. 조선 천지에, 어디에도, 율도국 따위는 없다.

영혼과 삶이 일치하는.."돌아오니 참 좋다"

집권 기간 내내 그가 보여준 분열과 봉하에서의 짧았지만 행복했던 순간들. 그래서 그를 단지 신자유주의자라고 말을 하는 것은 부족하다. 적어도 하나 확실한 것은 그는 신자유주의자이지만 이명박 대통령이나 다른 신자유주의자와는 결정적인 점에서 하나 다르다는 점이다. 그는 통치자로서 정책적으로는 신자유주의자였지만 그의 인간관은 신자유주의가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관점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통치의 이데올로기와 달랐던 것. 이것이 그의 분열의 근본이며, 죽음 전과 후에 사람들이 그에 대해 느끼는 정서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가 그냥 신자유주의자였다면 그는 봉화로 내려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의 비애를 그렇게 표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인간관은 참 뜨거웠다. 

그래서 그의 삶은 비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은 정치를 하는 동안에도 늘 실패하는 정치인으로 비극적이었고, 대통령이 되어 통치를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영혼과 대통령으로서의 자기의 역할이 분열되었던 비극적인 사람이었고(으로 이제는 기억되고 있으며), 그 좋다던 봉하로 내려와서도 결국은 해피엔딩을 맞이하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충분히 슬퍼하자.. 죽음에 가까와진 우리들의 운명

우린 그의 삶에서 비극을 본다. 그리고 그 비극은 남의 비극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져 있는 우리들의 삶이다. 우리는 그의 비극에서 우리의 삶과 운명을 보았으며 그 비극에 감응되어 우리의 삶을 슬퍼하고 애도한다. 

그런데 우리가 애도하는 것이 우리 삶의 비극이라면 나쁘지 않다. 충분히 울고 난 다음, 비로소 우리는 힘을 얻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시작을 시작해볼 수 있는 용을 써볼 수 있을테니깐 말이다. 충분히 슬퍼하자. 그의 죽음뿐만이 아니라 죽음에 가까워진 우리들의 운명과 삶을. 충분히 울고 난 후에야 우리는 사람 하나 짜르고 책임을 묻는 것으로는 끝낼 수 없는 노무현을 넘어 이 삶의 분열과 비극을 종식시킬 수 있는 그런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테니. 

by 엄교 | 2009/06/03 06:03 | 거리에서 냉소주의를 넘어 | 트랙백 | 덧글(0)

노무현의 죽음 1: 조롱과 애도 사이에 낀 삶과 죽음의 도착

   
조롱과 멸시, 애도와 기억 사이에 끼인 삶과 죽음의 도착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바라보며
2009년 05월 25일 (월) 14:25:56엄기호  uhmkiho@empal.com

  

한 편에서는 자연스럽게 죽어갈 목숨도 억지로 살릴 정도로 생물학적인 생명에는 목숨을 걸고 다른 한 편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생명도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아 죽은 목숨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삶과 죽음이 도착된 우리 사회이다.

선이 도착이 되면 악이 되고 악이 도착이 되면 선이 된다. 사랑이 도착이 되면 지배가 되고, 지배가 도착이 되면 사랑이 된다. 삶이 도착되어 죽음이 되고 죽음이 도착되어 삶이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삶과 죽음에서 얼마나 도착되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살아서 노무현은 조롱과 멸시와 모멸의 대상이었다

그는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서 끊이없이 조롱과 멸시, 모멸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의 ‘죄’와 그 ‘경중’에 상관없이 그는 날마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에 온 가족과 함께 발가벗겨졌다. 조선일보의 가장 경망스러운 만평조차도 검찰이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약장수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타박할 정도였다.

더 나아가 그는 범죄자로서도 대통령 취급을 받지 못했다. ‘고작’ 수십억 해먹었다. 쩨쩨하게 ‘마누라 핑계’나 대고 더 이상 받은 것은 없다고 말을 하는 날, 검찰 주변에서 ‘1억 짜리’ 시계 받았다고 폭로가 나와 개망신 당했다. 살아있는 권력과 조중동은 그를 큰 범죄인으로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전두환은 범죄자이지만 ‘국가 변란’과 같은 대통령‘급’이나 꾸는 무시무시한 범죄자이기에 역시 ‘대통령’감‘으로 남을 수 있었지만 그는 지난 6개월간 끊임없이 검찰 방송국이 날마다 떠들어대는 쫀쫀하고 비겁한 모리배에 지나지 않는 취급을 받았다.

그는 이미 대통령으로서는 사망 선고를 받았고,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마 감방에 갔을 것이고 그는 더 이상 형식적으로도 대통령으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역설적이게도, 도착적이게도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검찰은 그에 대한 조사의 종결을 선언하였으며, 그를 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처럼 취급하던 조중동을 필두로 한 모든 언론들이 ‘서거’라는 단어를 쓰며 애도의 사설을 쓰고 있다. 말할 가치도 없는 한나라당은 빼더라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노무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거리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하던 민주당은 스스로가 ‘상주’라고 표현하였다. 살아있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갑자기 ‘상주’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가장 윤리적인 척하는 이 작태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전도시키는 가장 도착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서울광장으로 향하는 모든 출구와 입구를 경찰이 봉쇄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을 추모하던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고 있다.

가장 ‘도착적’인 인간은 역시 이명박

물론 이중에서 가장 ‘도착적’인 인간은 역시 이명박이다. 겉으로는 애도를 한다고 하고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다하라고 하였지만 일반시민들이 서울시내에서 추모행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종로, 시청, 광화문, 대학로 일대를 경찰차로 완전 봉쇄하였으니 말이다. 가뜩 서울도심 집회금지니 뭐니 하며 온갖 조치를 다 취해놨는데 그게 무너지고 다시 촛불이 타오를까봐 사람의 추모조차 금지시키고 있다.

사람이 도착되면 짐승이 된다는 것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와중에 가장 ‘윤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조갑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서거’가 아닌 ‘자살’을 써야한다며 노무현의 죽음으로 남상국 사장의 자살도 종결될 수 있다고 썼다. 그가 유일하게 도착에 빠지지 않고 자기 윤리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인간의 윤리가 아닌 짐승의 윤리로서 말이다.

우린 이렇게 삶과 죽음이 도착된 시대를 살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져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될지 몰라 공포에 벌벌 떨어야하고 죽어서야 겨우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말이다. 물론 죽어서도 예우의 ‘예’자도 못받는 사람들도 있다. 잘나가는 특목고에서 매번 1등을 하다 5등을 한 다음에 부모로부터 야단맞는 것이 두렵고 스스로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 말이다. 그 아이들이 떨어진 자리는 소문나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돗물에 의해 재빠르게 치워지고 흙으로 덮어진다. 이 아이는 살아서도 죽은 존재였지만 죽어서는 아예 존재 자체가 완전히 지워져버린다. 한 학생의 말처럼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인 셈이다.

  
▲ 시민들이 마련한 빈소에 국화꽃을 들고 조문하려고 길게 줄을 서 있는 시민들. 조문객이 너무 많아서 덕수궁 돌담 길 앞에는 간이 분향소가 여럿 마련되었는데,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절을 올리는 형국이었다. 정부에선 '전임대통령으로서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라'고 말하면서 전국에 공식분향소를 실내에 설치하고 생색만 내고 있는 형편이다.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갖고 노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도착은 변해야하는 지점에서 변하지 않는 것, 변화한 것을 변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노무현은 죽은 권력이다. 나는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더라도 전직 대통령이니, 혹은 죽은 권력이니 처벌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노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

조중동과 이명박은 그들의 실책과 잘못을 가리기 위해, 마치 노무현이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인 것처럼(그들은 노무현이 죽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죽었으되 그를 완전히 죽여야지만 우리 사회가 가능한 것처럼 그를 검찰이라는 하급권력을 통하여 ‘갖고 놀았다’. 따라서 노무현은 봉하마을로 내려갔지만 그들은 그를 끊임없이 서울(신문이라는 지면으로, 혹은 검찰청으로)로 소환했어야만 했다. 그것이 죽은 권력을 가지고 정의를 세우며 살아있는 권력을 보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갖고 놀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도착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살아남기 위해 죽음이라는 도착적 선택을 택하였다. 도착에 도착이 부딪쳤다. 이 죽음 앞에서 살아있는 권력은 잠시나마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 죽은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던 살아있는 권력이 이제 그 ‘숙주’를 잃어버린 것이다. 숙주를 잃어버린 기생충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 청계광장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가 차단되었다. 청계광장을 경찰버스로 삥 둘러치고, 천변까지 경찰력으로 차단했다. 이명박 정부와 경찰이 느끼는 두려움은 예상을 넘어서는 것 같다.

숙주를 잃어버린 비겁한 정권은 무엇을 선택할까?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은 애도 이후에 비로소 다시 독립할 수 있다. 도착에서의 극복은 애도 이후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실연을 당한 후에 애도를 통해서 죽은 사랑을 장사지내고 나서야 새로운 사랑을 찾을 힘과 용기를 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랑은 지배가 되거나 스토킹이 되고 만다. 살아있는 권력도 이를 아는지 애도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있는 권력은 죽은 권력에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한다. 진정한 애도를 통해서 혼자 살아갈 성충으로 거듭나야할 것이다. 그런데 이 비겁한 권력이 과연 그렇게 스스로 살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게 또 다시 죽은 권력을 하나 더 찾아내서 그를 조롱하고 멸시할 것인가? 아마 후자가 될 것이다. 이 정부가 ‘의리도 예의도 없는’ 정부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집권 이후 그가 내놓은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해 길거리든 토론회든 어디에서건 반대한다고 외쳤지만 우리 세대에게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정치인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삼가 빕니다. 

by 엄교 | 2009/06/03 06:01 | 거리에서 냉소주의를 넘어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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